유럽의 요리를 이루는 요소 중에는 단순한 ‘맛’을 넘어 공동체의 역사와 정체성을 담아낸 음식들이 존재한다. 로마의 유대인 거주지 중심에 위치한 200년 된 제과점 ‘보치오네(Boccione)’에서 지금도 구워지고 있는 피자 디 베리데(Pizza di Beridde)가 그 대표적인 예다. 보는 이로 하여금 ‘피자’라는 이름에 혼동을 줄 수 있지만, 이 음식은 치즈나 도우와는 전혀 관계없는 독특한 과자 형태를 지닌다.
실제로 피자 디 베리데는 두께감 있는 과자에 가까운 음식으로, 아몬드, 잣, 건포도, 설탕에 절인 과일로 속을 채우고 고온에서 짙게 구워낸다. 검게 익은 겉면이 특징이며, 그 모습에서 다소 투박한 인상을 주지만, 로마 유대인 공동체에겐 역사를 지켜낸 대표적인 음식으로 여겨진다.
유대인 박해의 역사와 함께한 음식
피자 디 베리데의 기원은 한 세기를 넘긴다. 이 음식은 중세 말 스페인에서 추방된 유대인들이 15세기 말 로마에 정착하면서 전해온 것으로 추정된다. 이민자들은 자신들의 문화와 음식 전통을 새로운 환경에 이식했고, 그중 하나가 바로 이 과자 형태의 ‘피자’였다. 특히 당시 스페인 식민지였던 시칠리아에서 널리 쓰이던 아몬드, 잣, 절인 과일 등의 재료가 들어가 있는 점은 그 가능성을 뒷받침한다.
‘베리데’라는 이름은 유대교의 할례 의식을 뜻하는 히브리어 '브릿 밀라(Brit Milah)'에서 유래한 명칭으로, 원래는 이 의식 후 축하음식으로 제공되었다. 이후 결혼식, 성인식 등의 다양한 유대 행사에서 제공되는 전통 과자로 자리 잡았다. 과자를 준비한 가족은 이를 참석자들에게 작은 선물(kavod)로 건네며 공동체의 연대를 표현했다.
로마의 유대인 거리는 1555년 교황 파울루스 4세에 의해 공식적인 ‘게토’ 지역으로 격리되었으며, 이곳에서 유대인들은 오랜 시간 박해를 받아왔다. 종교적 제약, 거주지 제한, 강제 노동 등 다양한 억압 속에서도 공동체는 음식으로 정체성을 지켜냈다. 피자 디 베리데는 바로 그 상징 중 하나다.
시대를 넘어 전해지는 가족의 비법
이 전통 과자를 대표하는 제과점 보치오네는 1815년부터 로마 유대인 거리 한쪽에서 꾸준히 가업을 이어왔다. 현재까지도 리멘타니(Limentani) 가문의 여성들이 주도적으로 운영하고 있으며, 레시피는 외부에 공개되지 않는 가족의 비밀로 간직되고 있다. 지역 주민들은 이 레시피를 ‘유대 요리의 코카콜라’라고 부를 만큼 신비성 있게 여긴다.
보치오네의 피자 디 베리데는 일부러 겉면을 진하게 태우듯 굽는 것이 특징이다. 이는 단순한 미관이 아니라, 고온에서 구웠을 때 생기는 고소한 풍미와 특유의 식감 때문이다. 유대인의 식사 규정(카슈루트)을 고려해 계란이나 유제품 없이 식물성 유지(주로 해바라기유)를 사용하며, 재료는 며칠간 화이트 와인에 재워 풍미를 더한 후 결합되어 구워진다.
이 과제는 가정에서도 만들어질 수 있는 비교적 간단한 레시피를 갖고 있지만, 보치오네 특유의 질감과 풍미를 재현하기는 쉽지 않다. 그만큼 경험과 감각이 중요한 과자이며, 가족 공동체가 함께 만드는 과정 자체가 하나의 전통 보존 방식이 된다.
로마 유대 음식문화 속에 스며든 피자 디 베리데
피자 디 베리데는 ‘피자라는 단어가 의미했던 넓은 카테고리’를 잘 보여주는 예다. 16세기에서 19세기까지 이탈리아 요리서에서는 단순히 ‘오븐에 굽는 음식’을 통틀어 피자라고 불렀다. 달콤한 케이크, 포카치아, 두꺼운 비스킷 등 다양한 형태의 음식이 모두 ‘피자’라 불렸던 것이다.
로마 유대 음식문화는 그 자체로도 독립적이지만, 동시에 로마 전통 음식에 깊게 스며 있다. 대표적으로 로마 유대인이 도입한 요리 중에는 튀김 요리가 많다. 아티초크 튀김(carciofi alla giudia), 대구 튀김(baccalà fritto) 등이 대표적이며, 이는 유대 율법상 돼지기름을 사용할 수 없어 식물성 기름을 사용하던 전통에서 기인한다.
500년 이상 로마 현지 문화 속에서 살아남은 유대인들의 음식은 이제 로마의 주류 요리로 자리 잡았다. 그 과정에서 피자 디 베리데 역시 단순한 전통과자를 넘어서, 음식이 전할 수 있는 역사적 이야기의 매개체로 기능한다.
문화적 기억으로 살아남은 유대 음식의 상징
오늘날 피자 디 베리데는 단순한 전통 과자가 아니다. 이는 박해를 이겨낸 공동체의 회복력, 가정의 유산, 지역 정체성의 상징이다. 로마에 거주하는 유대인뿐 아니라 많은 현지인과 관광객이 이 과자를 찾으며, 한때 박해의 중심지였던 유대인 거리는 이제 문화와 미식이 공존하는 공간으로 거듭나고 있다.
특히 보치오네 제과점에서는 아직도 매일 아침 과자를 굽기 위해 야심한 새벽부터 오븐이 가동된다. 그 모습은 단순한 영업 활동을 넘어, 세기를 관통하는 기억과 전통의 지속을 상징하는 장면으로 이해된다.
유대인의 역사와 로마의 미식이 만난 피자 디 베리데
피자 디 베리데는 로마 유대인의 박해와 생존, 그리고 문화적 융합이 녹아든 음식이다. 보치오네 제과점에서 매일 새롭게 구워지는 이 과자는 단순한 간식이 아니라, 역사와 정체성, 공동체의 결속을 간직한 예술품이다. 로마 여행 중 유대인 거리(Via del Portico d’Ottavia)를 찾는다면, 피자 디 베리데를 맛보는 것은 로마의 또 다른 이야기를 경험하는 일과 같다.